“당신에게 나, 은혜입은 거 없어! ─『여공 1970, 그녀들의 역사』서평” (이재성, 김혜영)

2019. 3. 3. 19:07calico의 공부/글쓰기

비평문(서평)의 한 사례로서 필자들의 글을 올립니다. '디비피아'에서 pdf파일을 제공합니다만, 인쇄 당시 최종수정본이 반영되지 못한 관계로, 완성 원고는 <<진보평론>> 온라인판으로만 제공 되었었습니다. 진보평론 싸이트는 더 이상 열리지 않습니다. 



이재성·김혜영 (2005), “당신에게 나, 은혜입은 거 없어! ─『여공 1970, 그녀들의 역사』서평,”《진보평론》제26호, 330~344쪽.



20190303_여공1970_서평_온라인최종본.pdf



1. 표정 없는 권력, 무관심

지난 6월에 열린 “구로동맹파업 20주년 정신계승 대토론회”의 첫 순서는 증언대회였다.1) ‘가리봉전자’ 등 당시 투쟁사업장의 주역들이 나와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증언의 내용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왔다.

“우리는 ‘우리 일이니까(…)’지,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잘 모른다.
문익환 목사님이 ‘참 중요한, 역사에 남을 일이다’해서 좋았다”(A 증언) “지금 생각하니까 ‘의식화’인거 같애. 그 때는 몰랐지만. 저 생각은 그냥 해야 된다니까 해야 되는 거 같았어요. 알고 했겠어요? 모르니까했지.”(C증언)

증언자와 청중들은 함께 울고 웃었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묘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청중들은 미리 배포된 자료집에 실린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평가와, 토론회 시작 전에 있었던 몇몇 내빈들의 인사말을 통해서 구로동맹파업이 최초의 정치적 지역연대 파업투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청중들은 투쟁의 당사자들의 증언에서 ‘우리는 몰랐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익숙한 이야기 속으로 돌아갔다. 2부에는 연구자들 간에 긴 토론이 진행되었다. 논의가 마무리될 무렵, 토론자 중 한 사람이었던 노중기 교수가 1부 증언대회 때 느꼈던 그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에 대해서 지적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냥 흘려보낼 뻔 했던 증언자들의 고백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제 발표자였던 유경순 선생도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못했던 것들(투쟁 참여자들의 체험내용, 아픔, 상처 등)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은 점들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무의식적’ 무관심을 발견하게 된 순간이었다. 무관심은 흔히 단순한 공백이나 누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특정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은 의도적 배제 및 은폐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70년대 여성 민주노조운동에 대해서 공인된 이야기 외부에 존재하던 비공식적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한 연구가 바로 김원 박사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하 <여공 1970>)이다.2)

김원 박사(이하 저자)가 말하는 ‘익명적 지식(이하 예속된 앎)’이란 위 증언내용과 같은 것들이다.3) 위 내용들은 현재 노동운동을 하지 않는 다수의 70년대 여성노동운동가들의 구술증언에서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야기는 발언된 후 순식간에 무관심의 영역 속으로 밀어 넣어져 버리고 만다. 그런 무관심은 특정한 권력효과를 가져온다. 경우에 따라서 그 권력효과는 기획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관심과 무관심의 변주에 맞춰 해석된 모든 역사서술(담론) 속에는 ‘지배와 배제의 욕망’이 숨 쉬고 있다. 저자는 이 문제의식을 70년대 여성노동운동,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본 서평은 <여공 1970>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추구하고자 한다. 먼저 2장에서는 저자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되는 신경숙의 <외딴 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연구의 방법론과 연구내용을 간략하게 재구성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4장에서는 <여공 1970>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오해와 오류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 김원과 <외딴 방>: 사실도 픽션도 아닌 글쓰기

저자가 70년대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활용하는 것은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문학동네, 1995)이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70년대 말 구로공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열일곱 살의 신경숙’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오빠, 외사촌과 함께 공단주변의 좁은 자취방에서 살면서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밤에는 산업체특별고등학교의 학생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외딴방>은 유명한 소설가의 어려웠던 시절을 솔직하게 담아낸 소설로서는 유명했지만, 노동운동 진영이나 연구자들에게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작품이다.

소위 ‘노동소설’이란 착취 받던 노동자가 노동운동에 눈뜨게 되고, 동료 노동자들과 힘을 모아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동조합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파업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계급적 자각을 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형식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노동수기’ 역시 민주노조운동의 과정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다룬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래서 문헌으로 남겨진 노동자들의 이야기들 속에서는 노동운동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외딴 방>은 저자가 찾고 싶어 하던 ‘예속된 앎’으로 가득 차 있다. 저자가 이 책을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의 근거자료로 삼는 것은 <외딴 방>만큼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다양한 모습과 속내, 그리고 솔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여타의 사료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수기들은 공장 안팎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매우 전형화된 형태로 묘사되거나, 이미 노동해방문학의 서사구조에 걸맞는 형식에 의해, 짜여진 텍스트로서 재구성되어 있다.4) 노동수기들의 내용이 거짓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텍스트로는 노동자들의 삶 그 자체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저자가 사료로 활용하고 있는 소설인 <외딴 방>과 <공장의 불빛>(석정남, 일월서각, 1984) 등의 수기들의 차이가 소설(허구)과 르뽀(사실)라는 식으로 구분되는 것은 부당하다. 노동수기나 회고적 노동소설에 대해서는 ‘사실이냐 허구냐’라는 기준을 엄밀하게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객관성을 요구받는 학술적 연구 속에서 수기와 소설이 1차 자료로 활용되는 것은 모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저자의 연구와 방법론을 통해서 드러난 사실은, 기존 노동사 연구에서 노동수기와 증언을 사료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무반성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엮음, 돌베개, 1985)등의 자료집과 수기, 구술증언 등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하지만 특정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 텍스트들의 내용과 형식은, 인간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원리가 그러하듯, 많은 사실들 중 특정 사실을 선택하는 과정과, 그 ‘스토리(histoire)’들을 특정한 ‘이야기(récit)’5)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생산된 ‘문학적 텍스트’이다. 따라서 이 자료들을 보다 균형 있게 노동사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생산된 사회적 맥락과 그 자료들 외부에 존재하는 더 많은 사실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저자의 연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ꡔ외딴 방ꡕ에는 기존 수기와 노동조합운동사 등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이 진솔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3. 담론의 각축장 속 “여공”

1) 두 가지의 예속된 앎

저자는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을 따르고 있다. 푸코의 계보학은 소위 과학적이라고 받아들여진 담론이 갖는 단순한 인과관계의 설정, 목적론적인 역사인식을 거부하고, 복잡한 경로를 따라 지나간 사건들의 고유한 분포를 유지하는 ‘유래(Herkunft)’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는 지배적인 담론에 의해 체계적으로 은폐된 예속된 앎을 드러냄으로써 진행된다. 그러나 저자는 예속된 앎을 ‘익명적 지식’이라 표현하고, 실제 푸코가 이를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지는 않다. 푸코는 예속된 앎을 첫째, ‘특정한 방식으로 구획된 일정한 체계 속에서 은폐되어온 역사적 내용’, 둘째는 첫 번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가공되지 않았으며, 비과학적/비체계적 앎들로 폄하되어온 앎’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첫 번째 의미에서의 예속된 앎은 기능적이고 체계적인 전체 안에 들어있으나 은폐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번째 의미에서의 예속된 앎은 이 체계 밖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푸코가 사용하고 있는 첫 번째 의미에서의 예속된 앎, 즉 은폐되어온 역사적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 ‘완전한 역사를 복원하는 것’과 같은 작업으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은폐되었던 예속된 앎을 드러내는 작업은 지배적 담론이 전취하고 있는 체계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러난 예속된 앎은 비가시적 영역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비가시적 영역에 있던 예속된 앎이 가시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말을 ‘권력효과’의 맥락에서 읽어야한다는 점이다. 즉 드러난 예속적 앎은 지배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는가를, 그리고 그 지배담론이 특정 행위자를 어떤 주체로 구성하려하였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적 틀을 견지하고 있는 저자의 연구는 예속된 앎에 대한 명시적 구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배적 담론에 대항하는 예속된 앎을 드러냄으로써 지배적 담론 체계에 도전하고 있으며, 여공의 문화와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날 것인 예속된 앎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이 몇 세기를 아우르는 기간 동안 지배적 담론의 구성과 변용과 해체를 통찰하고 있는 것인 반면, 저자는 70년대라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특정 행위자들, 즉 여공을 둘러싼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을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2) 체계적인 배제: 민주화 담론의 뒷모습

저자가 다루고 있는 지배적 담론들은 1) 주변부 여성노동 담론 2) 희생양 담론 3) 성별분업 담론 4) 민주화 담론이며, 이에 대한 분석은 <여공 1970>의 1장에서 8장까지 방대한 분량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문화와 욕망에 대한 분석이 9장에서 11장 속에 담겨져 있다. 본 서평은 이들 내용 중에서 ‘민주화 담론’(6장~8장)과 여성 노동자들의 ‘문화와 욕망’에 대한 부분(9장~11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6장에서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 해석에서 가장 유력한 분석틀인 ‘민주노조 대 어용노조’의 대립구도가 가진 내용적 측면이 재검토 되었다. 동일방직 노조, YH 노조, 그리고 원풍모방 노조 등에서 여성 지부장과 대의원들이 선출되는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저자는 어용노조가 실제 여성노동자들에게 ‘남성지배노조’로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남성지배노조’란 여성들이 노조 운영에서 거의 배제되었던 것을, 노조 운영의 비민주성과 비자주성 ― 즉, 어용성 ― 보다 더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남성지배노조가 가능했던 원인을 비단 생물학적인 성별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대신에 희생양 담론, 성별분업 담론 등을 총동원한 근대화프로젝트의 남성중심적 성격이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 관철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436쪽). 그에게 ‘민주성’은 노조 자체의 성격이 아니라, 당시 여성 조합원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지는 특성(도덕성 등) 중의 하나였다. 오히려 당시 민주노조는 국가와 자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내부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477쪽).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기존 민주노조 담론을 비판한다. 이제 ‘민주성’은 당시 여성노동운동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즉 “노동자 혹은 노동운동을 다룬 서술에서 여성 노동자의 존재는 간과되었고, 가족, 성(혹은 성차)과 욕망 등 역사적 중요성은 무시되었다”는 것이다(491쪽) 그가 어용노조를 남성지배노조로, 그리고 민주노조를 ‘자주적 노조’로 성격 지움으로 해서 ‘민주 대 어용’의 구도는 모호해진다. 그리고 그 담론이 작동시키는 권력효과는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남성중심적 시각의 온존, 즉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타자화이다.

7장에서 저자는 ‘민주 대 어용’ 구도가 확정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적 투쟁사례인 청계피복 노조의 투쟁, 동일방직 노조의 ‘나체투쟁’과 ‘똥물사건’, 그리고 YH 노조의 신민당사 점거농성 사건 등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사 이면에 존재하던 ‘예속된 앎’들을 다시 불러온다. 저자는 청계피복 노조의 경우에 교회 단체(산업선교회와 JOC)와의 관련성보다 학생운동과의 연계가 더 강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503쪽) 청계피복 노조가 점차 노조로서의 성격보다는 운동단체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지적한다(511쪽). 동일방직 노조의 투쟁과 관련해서는 가장 민감한 문제가 다루어진다. 바로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있다가, 나중에 ‘변절’과‘배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몇몇 여성 활동가에 대한 평가이다.6)

저자는 당시 변절자로 몰렸던 사람들에 대해 다른 입장에서 해석하는 몇몇 증언들과, 당시 상황에 대한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두 후보 중에서 도시산업선교회와 집행부 측은 한 명을 지지해야만 했고”, “노조 내부에 비타협적 투쟁보다 사측과 협상을 강조하는 흐름이 존재”하게 된 상황에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와 지도부는 (그들을 - 인용자) ‘어용’으로 단죄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524~525쪽). ‘동지 아니면 적’으로 선을 그은 교회 단체와 노조 지도부의 판단이 그러한 ‘변절’과 ‘배반’을 야기했던 것이라는 주장이다(528쪽). 마지막으로 YH 노조의 신민당사 점거 투쟁은 기존 담론에서 박정희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70년대 여성민주노조운동의 경제주의적 한계라는 비판을 한 번에 반박할 수 있는, 정치적 투쟁이자 의식적인 투쟁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반대로 YH 노조가 이전 민주노조들의 투쟁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현장 중심의 노조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유방식을 강화시켰다”(549쪽)고 평가한다.

8장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교회 단체(산업선교회와 JOC)의 문제이다. 이 장은 내용적으로 6장과 7장의 분석에 포함되거나 중복되는 것이다. 저자는 당시 민주노조운동에서 교회단체가 차지했던 위치와 그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제출한다. 특히 그는 산업선교회가 민주노조 건설과정 초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점차 ‘노조운동의 자율성을 약화’시켜갔다고 비판한다(618쪽).

저자의 민주노조와 관련된 담론 비판 내용은 551쪽에서 561쪽에 걸쳐서 자세히 요약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상당수 해석들이 공유하는 것은 여공과 그들의 운동이 지닌 내부의 ‘복잡성’을 민주 대 어용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 환원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타 균열(남성노동자 문제, 교회 및 지식인과의 관계 문제 등)은 주변화된 서술로 밀려났다. 둘째, 민주노조의 주체인 여성노동자들은 중성적·남성적 전사, 투사로 형상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 일반이 무오류적인 것으로 신화화 되었다. 민주화 담론에 기초한 노동사 서술에서는 여성의 경험에 기초한 균열과 모순은 ‘비정치적’이고, ‘노동자답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셋째, 여공과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지배적 해석은 사후에 만들어진 담론적 구성물이다. 이는 오늘날 ‘민주화 담론의 국가화’와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는 ‘여성노동의 배제’ 문제에 대한 비판이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남성 편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속에서 남성 중심적 노조와 국가, 자본사이의 여성 노동자의 배제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3) 날 것인 앎: 여공의 문화와 욕망

저자는 이상과 같이 민주화담론 내부에서 체계적으로 은폐, 배제해왔던 예속된 앎을 드러낸 후, 날 것인 앎으로써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문화 그리고 욕망을 들여다보고자 시도한다.

먼저 9장에서 저자는 산업화 시기 여성노동자들이 기숙사와 소모임을 통해 독특한 형태의 노동자 문화, 즉 유사가족적 형태의 ‘자매애’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639쪽). 당시 ‘기숙사’는 현장에서의 불만과 문제들을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소모임’은 수다를 불만으로 조직화하는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기숙사와 소모임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일상적 정치의 장’이었다(639, 668쪽). 한편 소모임은 “그녀들의 신분상승 욕구와 소시민성, 내부의 이해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이기도 했다(690쪽).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 노동자들 간의 비공식적이고 일상적인 관계형성 기제와 그것이 만들어간 독자적인 노동자문화의 성격이었다. 그는 여성노동자들의 문화가 지식인과 교회 등의 민중문화가 이식된 것이라는 구해근(<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 비평사, 2002) 교수의 설명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녀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와 문화가 있었다(681쪽). 다만 지배적 담론의 권력효과에 의해 은폐되고 배제되어 왔을 뿐이다. 저자가 이러한 분석을 위해 동원하는 개념이 ‘자매애’이다. 그는 “여성노동자의 노동자문화를 다룰 개념적 도구는 여전히 취약한 상태”라고 지적하면서, 여성주의 진영 내에서 논란 속에 사용되어 왔던 ‘자매애’개념을 제한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매애’ 개념 자체의 비정치적 성격을 재해석하여 그것을 “사회와 국가 그리고 어용 노동조합으로부터 배제·분리되었던 여성노동자들 간의 연대의식의 문화적 표현”(640쪽)이라고 적극적으로 정의하였다.

10장에서 저자는 “지배적 담론이 배제해온 신분상승, 결혼 및 신체, 성욕 등을 둘러싼 여성노동자들의 익명적 지식을 통해 일상에서 그들이 욕망과 독립적인 의식들을 지니고 있었음을 밝히고자 한다”(693쪽)고 말한다. 즉 국가와 사회, 혹은 지식인 진영에서 생산한 여공에 대한 담론들은 여성노동자들을 ‘무성화’하거나, 혹은 ‘모성 담론’을 동원하여, ‘산업전사’이자 ‘생산적 주체’로 호명했다는 것이다(703쪽).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과정이 여성노동자들의 여성성이 훼손당하는 과정이며, 여성노동자들도 지배적인 담론을 깨닫고 여공으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했으며, 더 나아가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이다(703쪽). 이에 따라 저자는 “여성노동자들이 고고장, 올나이트 커피숍, 극장 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중산층 혹은 여대생의 것과 일치시키려 했다”고 주장한다(710쪽). 이어 성, 가족, 성욕, 결혼 등과 관련된 여성노동자들의 욕망에 관하여 기술한다. 즉 여공에 대한 지배적 담론들은 다양한 형태로 신성한 모성담론을 확산시키고, 이를 위해 ‘좋은 결혼’과 ‘신성한 육체’를 강조하였으며, 가정이라는 경계 외부에 있는 여성 노동은 주변화시켰다는 것이다(714~7쪽). 이와 같은 주장들을 통해 저자는“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자들과 식모들의 욕망, 독신 여성 노동자의 자립은‘비정상적인 여성’ 혹은 ‘도덕적으로 훈육’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지배적 담론 내부의 균열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746쪽).

마지막으로 11장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세계를 구성하였던 책과 노래(트로트와 노동가)를 분석하고 있다. ‘여공의 지성사’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는 지성이 지식인들에게만 존재했던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칫 ‘하위문화’로 무시될 수 있는 트로트가 여성노동자들의 감성과 체험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는 해석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의 남진, 나훈아 ‘신드롬’을 재해석했다. 결국 여성노동자들의 문화와 의식은 복잡하고 내적 균열과 모순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 존재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결론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노래’라는 비문헌 자료를 분석할 때 유용할 수 있는 문화이론 등의 분석방법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래는 선율, 박자, 장르 등 문헌형식과 차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 분석과 다르게 다루어져야 하는 자료이다. 다양한 자료들을 적절한 분석방법에 의해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면, 연구자는 ‘예속된 앎’과 인간 삶 속으로 더 깊이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자매애’, 계보학, 그리고 저항담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논쟁이 민감하고 여전히 뜨거운 이유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평가라도 ‘공과’를 균형 있게 다루어야 하겠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되면 독제체제 비판에 대한 ‘물타기’로 몰리기 십상이다. 반대로 선명하게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당시 정권을 ‘악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나면 경제성장과 그에 대한 대중적인 감정을 너무 간과하게 되는 편협한 윤리학으로 빠지기 쉽다. 저자의 연구도 이와 같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여공 1970>은 ‘예속된 앎’들을 통해서 국가와 자본의 지배담론을 비판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는 대항담론, 즉 민주화 담론의 ‘남성중심주의’까지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항세력 내부의 반성을 요구하는 담론은, 대항세력의 투쟁력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고, 한국 현대사에서 그런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연구를 최소한 한국정치와 저항운동이 가진 딜레마를 풀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조차 활용하지 못한다면, 대항세력 내에 잠재되어 있는 단순한 선악 이분법의 한계는 지양될 수 없을 것이다. <여공 1970>이 가진 가치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작업에서 더 생각해볼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는 ‘자매애’ 개념의 도입이 가져올 수 있는 혼란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9장에서 기숙사와 소모임을 통해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자 하였으며, 여기에 최소 수준으로 재정의된 - 하지만 거기서 정치적·문화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640쪽) - ‘자매애’ 개념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자매애’는 여성주의 진영에서 적지 않게 논쟁을 불러왔던 개념이다.

여성운동사의 맥락에서 ‘자매애’는 단순히 ‘여성들 간의 친밀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 전체 여성의 공통된 이해’임을 주장함으로써 여성들에게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연대할 것’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그러한 ‘자매애’ 개념이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하여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을 사용하는 저자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지 않으려면 기존 용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석하고, 저자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 밝혀주어야 한다. 다시 9장 내용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여성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견하려 노력했고, 특히 이를 비공식적 영역과 주변적 범주(수다 등)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통해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제목과 본문을 보면 여성노동자들의 문화가 ‘자매애’로 규정되는 듯 보이다가(636쪽), 다른 부분에서는 이를 단순히 노동자문화와 연대의 ‘기초’라고 정의하는 등(639쪽) 일관되지 못한 개념 구사를 하고 있다. 저자는 남성중심주의에 대항해 온 ‘자매애’ 개념 속에 담긴 많은 이들의 고민을 더 진지하게 다루었어야 했고, 새롭게 재정의하여 ‘자매애’ 개념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연구 과정에서 이 개념을 보다 일관성 있게 적용했어야 했다.

이에 더하여 자매애는 고정된 여성성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개념으로서, 마치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면 사회적으로 규정된 특정한 여성적 특징 내지는 여성성 혹은 여성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부당전제하는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자매애는 여성성을 따뜻함, 돌봄, 평화지향성이라 가정하는 고정된 여성성을 상정하고 이를 통해 피지배 집단으로서의 여성들 간의 연대를 추출하기 위한 주요한 논거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매애’는, 운동의 구호로는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남성성을 이성, 정신, 폭력성, 전쟁지향 등으로, 여성성을 감성, 육체, 비폭력성, 평화지향 등으로 정의하는 오래된 근대적 이분법을 수용함으로써 고정된 여성성을 정당화 혹은 강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매애’ 개념의 사용은 보다 신중한 성찰을 요구한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여성을 “남성적 질서 속에서 호전적 전사”로 만드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지만, “여성성=평화·탈전쟁으로 읽어야 한다”(91쪽)는 주장은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여성을 산업전사로, 희생양으로, 투사로 만드는 것이 여성을 특정한 담론 속으로 밀어 넣어 담론생산주체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마찬가지로 여성을 “평화·탈전쟁”의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지배적 담론의 내용만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여성에게 특정한 방식의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자매애’개념의 도입이 어떤 문제를 발생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뤘어야 한다.

둘째, 저자는 1970년대 여공에 대한 담론들과 ‘예속된 앎’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담론의 시대적 차이를 간과했다. 1970년대 여공에 대한 국가, 자본 그리고 노조의 담론은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생활과 노조활동을 하던 당시에 작동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민주화 담론 가운데 ‘여성노동운동의 한계’등을 지적하는 담론은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구성되었다. 원풍모방 노조의 와해(83년)이후에 만들어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과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80년대 정치적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함께 공존하던 조직이었다. 저자가 다룬 민주화 담론의 주요 내용들은 80년대 중반 노동운동에서 발생한 노선논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면 70년대를 살아가던 여성노동자들이, 그때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남성중심적 민주화 담론의 권력효과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비역사적 분석이 나오게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70년대 담론들도 그것이 오래 전부터 작동하던 것이라면, 각 담론들의 변화와 ‘합종연횡’의 역사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만약 담론들의 시대성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푸코의 계보학적 문제의식과 그 효과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셋째, 저자는 기존 담론에서 특정 해석이 신화화되는 경향성과 그 권력효과를 비판하였다(554, 831쪽). 그리고 푸코의 계보학 방법론을 통해서 신화화되고 권력화된 담론들의 균열과 권력효과 등을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러한 담론 구성을 지양하고, ‘더 나은 담론’들을 구성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비체계적이고 배제되었던 ‘예속된 앎’의 단편들이 아니고서는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담론을 구성해 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담론들의 성숙을 통해서 계급적, 성적 모순이 점차 지양되는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은 푸코에게도 심각하게 질문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다른 맥락에서 하나의 답변을 찾아보자면, 다시 2장에서 다뤄졌던 노동소설과 노동수기(그리고 노동조합사)의 텍스트성 문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현실의 노동·여성운동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혁명적 낙관주의와 정치적 입장(일종의 테제)이 강하게 드러나는 텍스트이다.7) 학술연구물 중에서도 노동문제나 여성문제와 관련된 것들은 이념적으로 민감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는 사회운동과 지식생산 활동이 가지는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문학이나, 학술연구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희망의 미학’은 사회운동 차원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인 요소가 된다. 하지만 사회운동 논리와 조금 다르게 문학과 학술연구 내에서 생산되는 테제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인식의 도식성을 가져오고, 이는 결과적으로 테제 그 자체의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유기환 200: 189, 192 참조). 저항담론의 건강성과 힘은 푸코가 말하는 ‘앎들의 봉기와 반란’을 넉넉히 견디어 낼 수 있을 때에 튼튼하게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5. 말하기와 글쓰기의 힘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계급과 젠더와 관련된 이론적 논의 속에서도 다른 어떤 사례보다 세심하게 연구되어야 할 분야이다. 최근 한국노동운동사 역사서와 학술연구들에서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이 다각도로 재조명되는 현상은 바람직하고 반가운 일이다. ꡔ여공 1970ꡕ은 한국노동사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주변적 여성들에 대한 주변적 담론들을, 주변적 방법론과 시각으로 연구하여 주변적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이 책이 노동사 연구에 던지는 문제의식만큼은 결코 주변에만 머무르지 않게 될 것 같다. 계급과 젠더에 대한 연구에서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계급의식과 여성의식, 계급적 정체성과 여성 정체성(또는 여성성) 등의 개념들이다.

그리고 계급과 젠더 범주를 보다 통합적으로, 총체적으로 사고해야 함이 빈번하게 주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개념들은 연구자들 또는 운동가들, 나아가 다양한 행위주체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편치 않게 만들고 있다. 사회적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구별됨’과 ‘동일함’이라는 반대 의미의 어원을 공유하는 것인 만큼, 인간의 정체성은 복잡하고, 언제나 타협가능하며(Jenkins, 1996: 1~5), 종종 의지의 힘을 무력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 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그것이 모순적이고 비체계적이라 할지라도, 귀를 기울여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공 1970>은 그러한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다. 홉스봄은 “분석에 기초한 예측과 열망에 근거한 예측을 신중하게 구분”할 것을 주문하면서 “혁명기의 예외적인 의사분출을 제외하고는 평상시 저술에서는 자신들을 대체로 또는 전혀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였다(홉스봄 002: 77, 150).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는 노동운동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오늘의 노동자들과 노동연구자들은 어제의 노동자들, 노동운동가들로부터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이것이 작가 신경숙과 저자 김원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동일한 질문이었다. 구로공단의 여성노동자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된 신경숙은 ‘너의 소설에 우리 얘긴 없더구나’라는 옛 동료의 전화를 받고 자기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외딴 방>의 도입부는 과거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압박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여공 1970>의 두툼한 프롤로그가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서사구조와 문체의 일관성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글쓰기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여공’이었음을, 그리고 그 시절의 가난한 가족사를 공개하는 것이 왜 이리 힘겨운 것일까?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효과들의 작동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저자 김원은 학술적 글쓰기를 통해서 그 권력효과가 ‘보여 질 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이미 말했으되 청취되지 않았던,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들을 다시 살려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는 연구자․지식인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결단으로 나아가고 있다.

두 ‘글쓴이’가 자신들의 글쓰기를 통해 얻게 되는 그 무엇은, 쉽게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말하기’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역사 속에서 침묵되어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가 ‘닫힌 작품’(움베르토 에코) 또는 ‘다시 쓸 수 없는 텍스트’(바르트)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다(유기환 2003, 193 참조). <여공 1970>은 한국노동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 시도, 그리고 계급․성과 담론에 관련된 이론들이 현실과 역사 속에서 함께 논쟁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하지만 이 두껍고 무거운 책을 천천히 읽어갈 여유를 가진 독자들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우리는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이 책이 한국사와 한국노동사 연구자들에게, 그리고 다양한 독자들에게 열린 작품이자, 다시 쓰여 지는 텍스트가 되길 기대한다.(끝)

* 본 서평의 제목은 아래 인용문에서 온 것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말 뼈다귀야. 여기는 생산현장이야. 생산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관할이라고. 어디다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
생산과장과 유채옥의 삿대질이 오가는 싸움에 미스 최가 운다. 생산과장 대신
총무과장이 달려와 유채옥에게 배은망덕한 년, 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유채옥은 총무과장을 쏘아본다. 
“당신에게 나, 은혜입은 거 없어!” (신경숙 93쪽; 김원 389쪽)


<참고문헌>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위원회(편찬위원회). 2005.
<구로동맹파업의 기억, 기록, 계승을 위하여>. 자료집.
미셸 푸코. 박정자 역.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98. 서울: 동문선.
신경숙. 1995. <외딴 방>. 문학동네.
에릭 홉스봄. 강성호 역. 2002. <역사론>. 민음사.
유기환. 2003.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책세상.
Richard Jenkins. 1996. Social Identity. Routldge.

<미주>
1) 이 토론회는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주최로 2005년 6월 18일 서울 고대구로병원 대강당에서 열렸다. 토론회는 3부로 나뉘어져 1부 증언대회, 2부 연구자 토론, 3부 단체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기념행사에 증언대회가 기획된 것은 매우 새로운 시도였다. 그리고 시대와 체험의 차이를 녹여낼 수 있는 생생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다.
2) 같은 맥락에서 전순옥의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2004)도 한국 사회 집단의식의 두 가지 공백, 또는 무관심에 대해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했다. 
3) 저자의 ‘익명적 지식’은 푸코의 ‘예속된 앎(subjugated knowledge)’을 의미한다.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은 지배적 담론에 의해 체계적으로 은폐되어온 ‘예속된 앎’을 드러냄으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한편, 특정 대상에 대한 체계화 혹은 과학화를 의미하는 ‘지식’보다는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의미를 보다 잘 표현하고 있는 ‘앎’이 보다 적절할 것이라 판단하여 본 서평에서는 원래대로 ‘예속된 앎’을 사용하고자 한다. 아마 저자는 여성노동자들을 자율적인 주체로 재발견하면서, 예속된 앎이라는 표현보다는 익명적 지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룰 것이다.
4) 노동운동 수기와 상반되는 모범근로자 수기 역시 전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준의 “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생활과 의식 - 이른바 ‘모범 근로자’를 중심으로”(역사학연구소, <역사연구> 제 10호, 2002)를 참고할 수 있다
5) ‘이야기’는 ‘스토리’를 구조화한 것이다. 만약 서른 명의 학생들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쓰라는 숙제를 받아서 그 이야기들을 써 왔다면, 학생들은 하나의 동일한 ‘스토리’로 각기 다른 서른 개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 된다. ‘스토리’가 건축 자재라면 ‘이야기’는 그것을 구조화함으로써 완성된 건축물이다(유기환, 2003: 67). 노동수기나 노동소설 등에서 착취하는 자본가, 억압하는 국가,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라는 기본 골격이 ‘스토리’라면, 구체적인 시공간과 행위자들을 통해서 펼쳐지는 다양한 노동세계의 모습들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일반성과 특수성 간의 긴장은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문학적 텍스트 안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6)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일방직 노조와 반도상사 노조의 사례이다. 여기서 초기 노조 건설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몇몇 여성 활동가들은 후에 차기 지부장 선거 등의 시점에서 민주노조운동과 대립하면서 심지어 회사와 정권의 반노조 활동에 가담하였다. 이는 ‘민주 대 어용’이라는 구도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사례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거꾸로 저자에게 이 사례들은 ‘민주 대 어용’ 구도를 근본적으로 허무는 사례로 해석되고 있다.
7) 페미니즘 문학에 대해서도 유사한 논의가 가능하다(유기환, 2003: 164). 테제소설이란 특정 명제의 설명과 선전을 위해 쓰여 진 소설을 말한다(같은 책, 198). 정치적 팜플렛은 테제 텍스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